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평릉 사변 (문단 편집) == 과정 == 정시 10년(249년) 정월 갑오일, 환범이 예전에 형제 중 한 명은 남겨두라고 조언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이 황제 [[조방]]을 모시고 세 아우 조희, 조훈, 조언과 심복 하안, 어림군 등을 거느리고 [[조예|명제(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으로 참배를 가자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 [[사마소]]와 함께 심복 장수들, 사마사가 비밀리에 양성한 사병 3,000여 명을 동원해 수도 낙양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사마의는 사도 [[고유(삼국지)|고유]]에게 대장군직을 맡겨 조상의 진지를, 태복 왕관에게 중령군직을 맡겨 조희의 진지를 점거하게 했고, 자신은 조예의 황후인 곽태후([[명원황후]])를 찾아가 태위 장제와 상서령 [[사마부]]를 시켜 표문을 장서하도록 했다. 조상은 낙양 주둔군의 진채를 전부 낙양성 안에 배치했는데, 그로 인해 낙양성이 사마의의 수중에 떨어지자 조상의 군대는 조상과 단절되어 버렸다. 조씨 형제들이 전부 성 밖에 있었던 탓에 사마씨의 세력에게 점거된 군사들과 장교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사마의는 적어도 이들 군대가 조상 형제의 명령을 받지 못하게끔 할 수 있었다.[* 이후 사마씨는 군을 새로 배치해서 성벽 외부에도 진채를 설치해 군을 나누어 주둔시키게 된다.] 조상의 파벌이었던 수문장 [[엄세]]가 궁수들을 이끌고 사마의를 공격했으나 편장 [[손겸]]의 설득으로 중지했고, 조상의 수하 사마 [[노지(위진)|노지]]가 참군 [[신창(삼국지)|신창]]과 상의해 누이 [[신헌영]]과 함께 황제를 찾아갔다. 한편 사마의는 대사농 [[환범]]도 중령군으로 불러들였는데, 환범은 이에 응하려다가 황제를 끼고있는 조상에게 붙어야 유리하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황제가 있는 조상 측으로 마음을 바꾸고, 부하 사번을 물리치고 겨우 성을 빠져나갔다. 사마의는 [[허윤]]과 [[진태]]를 불러 조상에게 항복하면 병권만 거두지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는 말을 전하게 했고, 전중교위 [[윤대목]]에게도 같은 명을 내렸다. 급보를 들은 조상이 가족의 처지를 생각하며 망설이는 동안 환범과 주부 [[양종]]은 군사를 일으켜 천자와 함께 [[쉬창|허창]]으로 이동, 사마의를 무찌르자는 강경 대책을 주장했다. 환범도 조상에게 황제를 끼고 있는 장점을 이용해 허창으로 가서 외병을 불러들이고 허창에서 항전을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미 조상은 겁을 먹었으며 낙양성 안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되어 그 진언을 무시했다. 다시 [[조희]]에게 조상 일족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며 결단을 촉구했으나, 조희는 듣지 않았다. 이에 애가 탄 환범은 다시 조희에게 그의 직속 별군과 낙양전농은 성 밖에 있으므로 쓸 수 있으며 허창에 가면 무기가 있고 군량은 자신의 직임인 대사농을 이용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조희도 듣지 않았다. 당시 사마의는 겨우 낙양 주변에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훗날 사마씨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세력까지 있단걸 고려해 봤을때 비록 무능력 하다 해도 조상의 직위가 대장군인 만큼 조상이 대장군부가 있는 허창으로 가서 황제인 조방을 앞세워 사마의 일당을 역적으로 선포하는 한편 비상명령을 발동후 지지세력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사마의 일파와 죽기살기로 싸웠다면 어쨌든 낙양 주변에만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마의 보다는 세력 자체는 조상이 앞서는 형태라 판세가 뒤집어졌을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대가 약한 조상은 [[허윤]]과 [[진태]], [[윤대목]]이 잇따라 명을 전해오자 결국 싸우지 않고 병권을 고스란히 넘기기로 했다. 이 때 병권을 넘기기로 결정한 조상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별로 잃는 거 없이 부가옹(富家翁, 돈 많은 늙은이)으로 살 수 있다. 기가 막힌 환범은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울며 말했다. > [[조진|조자단]]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당신이 낳은 자식들은 [[개돼지|개새끼나 송아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쩌다 오늘날 당신의 자식들에게 연좌되어 일족이 멸망하게 된 겁니까! 조상이 대장군의 인수를 허윤과 진태에게 넘기자 군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몇몇 관료들만이 남아 사마의에게 투항했으며, 사마의는 그들을 저택에 감금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후 사마의는 환관 장당을 고문해 조상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증언을 받아내었다. 이에 따라 조상의 측근 6인을 옥에 가두고, 조상은 물론이고 세 형제를 포함한 그 가족과 일당 모두를 붙잡아 족멸하며, 재산은 몰수해 국고에 넣어 후환을 끊었다. 일생일대의 도박을 벌였던 환범 역시 일족이 몰살당했다. 오로지 조상의 종제인 문숙의 아내만이 살아남아 양자를 두어 조씨의 대통을 이었다. 이후 사마의는 태위 [[장제(조위 태위)|장제]]의 건의로 노지와 신창을 복직시키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조상의 죄를 다스릴 때, 하안을 옆에 두었는데 하안은 저 혼자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욕하면서[* 이 기록이 《위씨춘추》에 있는데 [[사마사]]와 친했다는 내용 바로 밑에 있다. 이걸 믿고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 살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사마의가 하안에게 "죄인은 모두 8족"이라고 말하자 하안은 필사적으로 살겠다고 정밀, 등양 등 7족을 말했지만 사마의는 >아직 부족하오. 라는 대답을 했다. 하안이 이에 급히 자신을 말하는 거냐고 하자 사마의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이들을 모두 죽였다. 나머지 조상 일파인 하후현은 면직됐다가 나중에 다시 승진해 복귀했지만 5년 뒤 황제 조방의 친위정변 모의에 참여하면서 결국 삼족이 멸해지고 친척들은 한반도의 낙랑군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양호(삼국지)|양호]]를 조상 일파로 끌어들이려고까지 했던 [[왕침]]은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용서받았다. 왕침은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하는 것을 보고 266년에 죽었다. 이후 사마의는 승상에 봉해지고, [[구석]]의 예우가 내려지면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해 이로써 사마씨가 위 제국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다만 사마의는 구석의 예우를 거부함으로서 자신의 야심을 갈무리했다. 그 나이도 이제 칠순이라 굳이 그가 전권을 다 잡는다는 인상을 줄 필요없이 뒷일은 믿음직한 장자인 [[사마사]]에게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